비봉의 첫 햇살 순수비를 읽다 (금석문金石文을 만나러 가는 길)
달의 절벽

- 달이 어둠을 깎아질러 만든 빛의 벼랑이다. 새벽이슬 같은 달빛이 절벽을 흘러 더러는 별의 눈물이 된다. 지상에 내린 달빛 사리들이 팥배나무 붉은 열매로 맺혔다. 떠오르던 해를 기다리던 달이 일출과 함께 자신의 절벽 아래로 길을 가고 있다.
새날의 기원

- 아랫돌 빼어 윗돌로 놓지 않는다. 타인의 마음에 하나를 더 지극정성으로 더할 뿐 그의 돌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것이 돌탑이다. 그것이 마음이다. 돌탑이 마음으로 나타나고, 마음이 돌탑으로 나타난다. 고목 옆에 지나는 이들이 하나씩 쌓아올린 작은 돌탑에 첫 햇살이 비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치던 그 햇살이다. 우리를 눈 뜨게 하던.
북한산 비봉

- 빛은 어둠을 오독하지 않는다. 첩첩한 산그리메 너머 새해 일출의 장엄경이 시작된다. 삼라만상 천지에 깃든 어둠을 물리는 엄숙하고 삼엄한 의식이다. 국보 제3호인 ‘북한산진흥왕순수비’를 읽는 금빛 햇살이 아프도록 눈을 찌른다. 내 안의 어둠도 오독하지 않으려는 빛의 의지다. 천년 어둠에 잠긴 금석문조차 새로이 읽는 빛이다.
사모바위와 승가사

- 바위에는 불성(佛性)이 깃들어 있다. 그 존재의 중량감으로 지그시 눌러 감췄을 뿐이다. 아무리 감춰도 숨겨지지 않는 불성이 있다. 사모바위는 그런 바위의 하나다. 머리도 있고 눈(불안佛眼)도 있다. 거기에 사모(紗帽)까지 썼다. 사모(紗帽)는 과거 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쓰던 검은 모자다. 오사모(烏紗帽)가 원어다. 1816년 7월 추사가 이곳 비봉에 올라오며 저 바위에 모자를 벗어놓았을 법하다. 그가 걸어간 자취를 사모바위가 오래 바라보고 있다. 우리 역사에 그와 같은 졸박청고(拙樸淸高)하고 청고고아(淸高古雅)한 선생이 다시 오기를 꿈꾸며.
탕춘대 솔밭의 새벽

- 산으로 가는 새벽의 숲길이다. 소나무는 산사의 새벽 종소리보다 먼저 깬다. 어둠은 그만 달빛에 들켜 탕춘대성 암문을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향로봉 아래에 이르기까지 내내 솔향기가 은은하다. 명징한 달빛, 시린 별빛. 하늘은 또 어떤 하루를 준비하기 위하여 저토록 고요한 것일까. 저리 깊은 것일까.
승가사 마애불(화첩)

- 승가사에 있는 보물 제215호인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다. ‘반 감아 뜬 눈, 반 떠 감긴 눈.’ 빛과 어둠의 세계에 대하여 마애불이 우리에게 주는 말이다. 어둠 속에도 흰 빛 발하는 마애불의 여여한 미소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보면 안다. 걸음 하나에도 빛과 어둠이 있다. 어둠과 빛 속에 사람의 길이 있다.
산성 주능선의 조망, 장엄한 고독을 보다 (구기계곡의 은빛 고요)
문수봉과 보현봉

- 문수봉과 보현봉, 마주보는 봉우리다. 독립된 두 봉우리는 높이를 다투지 않는다. 서로의 침묵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그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지혜요, 또 하나는 덕이다. 지혜가 덕을 우러르고, 덕은 지혜를 존숭한다. 지혜와 덕 사이로 큰 문이 있다. 들어서면 누구나 새롭게 열리는 세계가 있다. 펼쳐지는 장엄경이 있다.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나안의 시력으로도 발견하는 세계가 있다.
대남문과 문수사

- 대남문에서 문수사로 가는 길이 보인다. 대웅전과 응진전 사이 ‘삼각산천연문수동굴’ 부처님의 미소도 보인다. 겨울햇살에 꽃잎을 여는 꽃살문도 보인다. 눈 천지 속에서 솟아난 연꽃바위도 보인다. 그 꽃송이 보고 있는 동자바위도 보인다. 지금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겨울 구기동 계곡

- 눈 내린 겨울 산이 맑고 그윽하다. 계곡의 바위와 돌마다 흰 눈이 소복하다. 눈을 인 소나무는 때를 만나 빛이 더욱 푸르다. 그 사이로 난 산길은 어디로 가는 길이어서 저리 심원한 것일까. 티끌 없는 마음의 바탕이 희다. 큰 바위 아래 사는 버들치의 소리까지 들릴 만큼 투명하다.
백운대와 대성문

- 천연의 요새, 한때 신들이 거처했던 하늘의 성채다. 높고 큰 봉우리들의 침묵조차 잠언이 된다. 바라보는 순간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말들을 빼앗기고 만다. 귀는 깊어지고 우리 인식의 눈은 땅에서 하늘로 열린다.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광활한 대지 저 너머 미래로.
바위속의 도시

- 너무 완고(頑固)하면 융통성이 없다. 고집이 세져 남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만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까닭이다. 바위가 바위를 만나는 이유다. 서로가 만나 세상을 보는 창이 된다. 바위가 틈을 열어 바라보는 세상이 멀고 깊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설송

- 소나무는 무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잎갈나무들 서둘러 바늘잎을 버릴 때 소나무는 하늘의 무게에 대하여 생각한다. 제 존재의 뼈마디가 얼마만큼 강고한 것인지를 가늠해본다. 제 몸에도 무게중심에 따른 삶의 방향이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허공에도 무수한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게와 존재가 서로 길항하는 가운데 빛이 더욱 푸르러짐을 소나무는 안다. 생의 무게를 삶의 예술로 바꾼 목숨의 직접성이 흰 눈 속에서 더욱 푸르게 빛난다.
우이령길에서 산을 듣다 (숨어버린 '자신의 말' 듣는 자연의 길)
우이령 길목에서

- 우이령은 1968년 이후 41년 동안이나 굳게 닫혀 있었다. 2009년 7월 10일 개방된 이후 하루 탐방객 수를 일정하게 제한해 왔다. 그 결과 숲과 계곡은 청정하며 어느 곳보다 호젓하다.
석굴암 일주문의 밤

- 큰 스님의 독경이 별빛으로 빛나고, 다시 눈처럼 쏟아진다. 달은 원융무애로 둥글어 품지 못하는 어둠이 없다.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빛나는 별빛이여 내 등을 어루만지는 달빛이여 목숨은 항상 목이 마르다. 그 갈증을 적셔주는 빛의 만다라여!
우이동계곡 돌탑

오색딱따구리

- 나무들의 뼈를 치며
적설의 흰 숲 울리는
청아한 탁목啄木 소리에
은빛 눈가루 우수수 쏟아진다
꽝꽝 언 오봉산 골짜기
두꺼운 얼음이 짜-앙 하고 깨진다
깎아지른 벼랑에 앉아
천년동안 말을 버린 오봉의 바위들이
일제히 눈 뜬다
아무리 들어도 큰 소식 하신
석굴암 노스님의 목탁소리만 같아
귀 활짝 열고 듣는다
오색찬란한 저 새의
한겨울 독경
북한산 상장능선과 일주문

- 저 일주문은 어디에 세워진 것인가. 어느 세계로 가는 길이기에 저토록 티 없이 맑고 아름다운가. 극적 세계에 이른 대적(大寂)의 고요, 그 고요함 속에서 빛이 난다. 빛은 겨울 안거에 든 나무들의 발목까지 차오르고 푸른 하늘의 광휘로 흩어진다. 오봉산 관음봉 중턱에 자리한 석굴암, 거기로 가는 길손이 보인다. 빛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빛 속으로 가고 있다.
북한산 오봉과 석굴암

- 천변만화의 조화가 정렬에 드는 어느 행성들과도 같이 정연한 질서 속에 있다. 우이령으로 가는 길에서 도열한 오봉의 묵중한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오봉산이 말하고 있는 산음(山音)이 들린다. ‘몸은 하나의 질서요, 정신은 자유로운 바람이며 구름이며 물이다.’ 형태를 바꾸어도 본질은 그대로다. 변화를 이끌어내는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력은 신선한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 물이 된다. 그 근간을 질서가 지킨다. 오봉은 그런 변화와 질서가 있다.
상생의 봄

- ‘홀로 선다는 것’ 듣기 좋은 거짓말이다. 나를 지탱하고 있는 무수한 버팀목이 있다.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부모형제가 있고, 아내와 자식이 있고, 이웃이 있다. 세상의 바람과 무게로부터 홀로서다가 넘어진 나무가 한둘이랴. 넘어지는 나무를 급하게 받아내다가 자신마저 중동을 내준 두 나무의 삶이 엄숙하다. 때로는 우리를 혹독하게 몰아치는 태풍과 폭우와 폭설 등으로 폭폭할 때가 있다. 그런 우리를 견디게 하는 것은 나 외에 지금처럼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윈더봉의 빛 망월(望月)의 진경을 보다 (덕의 샘물이 흐르는 길)
도봉산 망월사의 봄

- 이미 달을 보았으니 봄이 오고, 봄이 오니 꽃이 핀다. 자연이 그린 불후의 명작 망월사 산수화의 아름다움은 지상의 것이 아니다. 천하절경 심처에 천중선원인 달까지 품었으니 오래 전에 속(俗)을 벗어났다. 신라 선덕여왕 때 삼국통일과 왕실의 융성을 기원하기 위해 해호선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또한 만공, 한암, 성월, 전강, 금오, 춘성 등 한 시대의 유명한 선사들의 법향이 서린 참선도량이다. 해탈문에 한 발 들여놓는 것으로도 무명번뇌가 감로수로 씻기고, 선방 문고리 잡아보는 것만으로도 삼세 업장이 소멸할 진저 어찌 봄이 오지 않으랴.
혜거탑 망월

- 고려 최초의 국사 ‘망월사혜거국사부도’다. 팔각원당형의 구조 안에 둥근 달덩어리가 들었다. 하늘의 만월은 만상의 어둠을 비추고, 부도에 든 달은 사람의 마음을 비춘다. 달과 달 사이에서 일어서는 능선의 바위들, 일어서는 군락의 노송들. 달빛 속에서 꽃들이 핀다. 달빛에 꽃물이 든다.
두꺼비바위와 장군송

- 장군송의 기상은 장쾌하게 하늘을 찌르고, 두꺼비바위는 기필코 달을 삼켜보려는 기세로 미동도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심하여 미적거리를 유지한 채 유심으로 번진 무음의 세계가 진달래꽃으로 핀다. 꽃 사이를 지나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화음(花音)의 물소리가 붉다.
망월

- 막 보름을 넘긴 기망(旣望)이다. 밤은 더없이 청명하다. 마침내 기다리던 달이 오른다. 보름달보다 더 밝고 크고 명징한 만월, 저 달이 바로 선원이다. 통천문, 여여문, 금강문 등 그 어떤 문도 없다. 문고리조차 없는 천중선원이다. 아랑곳없이 몰려오는 청운, 자운, 백운 등의 운수납자들 별들도 저 앞에서는 저리 빛을 흐린다.
새봄

- 죽음처럼 깊었던 침묵의 자리에 돋는 새순입니다. 도무지 오지 않을 것 같은 긴 겨울 끝에서 찾아온 봄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계절이 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도 않는 그 무언가에서 희망이 옵니다. 이 봄 당신이 있어서 고운 빛이 돕니다. 꽃물 든 당신의 미소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당신을 바라보다 이 봄 다 지나가도 섭섭해 하지 않겠습니다. 언제나 봄처럼 와서 봄처럼 남는 당신이 나의 봄이기 때문입니다.
탑과 꽃

- 차마 알려주고 싶지 않은 피안의 세계다. 오는 길 가는 길 다 끊어버리고 파묻히고 싶은 천년 고요다. 흠씬 맞고 싶은 하늘의 꽃비다. 누가 물어물어 걸음 하려 하는가. 선인․만장․자운봉을 도반으로 삼아 고독과 벗한 이 독거를 어이 탐하려 하는가. 지도를 버리면 지도가 되는 이 마음의 세계.
진달래능선에서 만경(萬景)의 봄빛에 물들다 (꽃과 눈맞아 달아나는 봄)
중성문과 왕버들

- 중성문의 수구를 빠져 나온 불어난 봄물만큼 왕버들의 빛이 푸르다. 솰솰거리며 흘러가는 물살에서 여름으로 달아나는 봄의 속도가 느껴진다. 저 성루에 올라보면 거대한 노적봉이 보인다. 한번쯤 붙들고 싶은 화두가 가슴에 쿵, 하고 안긴다.
북한산 진달래능선

- 진달래 피지 않는 우리 강토는 봄이 아니다. 이 땅의 봄은 진달래가 피면서 꽃물결을 이룬다. 진달래가 피면 두견새가 운다. 우리 민족의 정서에 가장 붉고 친근한 꽃도 진달래다. 진달래가 핀 땅은 어디나 낙토(樂土)다. 화전(花煎)에 두견주(杜鵑酒)를 마시던 조상들의 고아한 정취 속에 하루를 보내고 싶다. 원경의 인수봉과 영봉, 도봉산을 바라보는 그림 속의 두 사람, 산을 내려가면 그러하리.
상생

- 고목이 된 아까시나무 속이 텅 비었다. 그 빈 공동(空洞)의 심부에 산괴불주머니 노란 꽃을 피웠다. 노구(老軀)의 아까시나무가 제 품에 품은 새 생명이다. 아까시나무는 이 땅의 비탈면을 붙들어주었던 나무다. 아낌없이 꿀을 준 나무다. 쓰러져서는 누군가의 의자로 남는다. 헌신하며 이타적 삶을 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상생의 도를 실천하는 나무가 피운 꽃불이 내 안 환한 영혼의 등불로 오른다.
대동문의 봄

- 현판 대동문(大東門) 글씨 옆에 ‘숙종어필집자’라 쓰여 있다. 봄을 맞아 산을 찾은 사람들이 꽃 속에 묻혀 있다. 숙종임금의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던 어심 속에 들어 있는 듯하다. 진달래꽃 복사꽃 저 꽃들이 지면 녹음이 짙어지리라. 21세기 오늘의 수도 서울을 들여다볼 수 있는 현대판 풍속화 속에서 봄이 무르익었다.
북한산 소나무와 진달래

- 우이동으로 내려가며 만나는 뿌리의 길이다. 겉으로 드러난 뿌리들이 얽혀서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다. 뿌리와 뿌리를 연결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분투가 눈물겹다. 거룩하다.
북한산 소나무

- 진달래능선 바위벼랑 위에 홀로 선 소나무다. 곡절만큼 방향을 틀었던 줄기와 가지들이 삶의 내력을 말없이 들려준다. 한 세계에 이른다는 것, 그것은 필시 자신의 전부를 걸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두날 위에 선 무녀처럼 신들린 듯 벌이고 있는 춤사위가 절박했던 순간순간들을 말해주고 있다. 절절함 속에서 모든 것이 절정에 이른다. 배경으로 둘러친 절경의 만경대와 백운대가 소나무가 절정에서 본 정신의 세계이려니.
우이남능선의 나무들 우기에 들다 (무수(無愁)골에 깃든 평화와 근심)
그믐달의 묘지

- 세종의 아들 이당과 그 후손들의 무덤이 있는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이다. 맨 아래에 작은 무덤 하나가 눈길을 끈다. 세종의 증손자인 강녕군 기(琦)의 집에 살았던 ‘금동’이라는 노비의 무덤이다. 연산군의 애기(愛妓)가 강녕군의 집을 뺏고자 하는 과정에서 주인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주인에게 끝까지 충직했던 그를 위한 예와 의리인 것이다. 춘추시대 도적에게도 맨 뒤에 빠져나오는 의(義)라는 도(道)가 있었다. 자신이 있을 자리에서 도망을 쳐 살아난 예는 없다.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새삼 충무공의 절의가 그립다.
도봉산 무수골 모내기

- 근심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 근심이 깊으면 병이 되고 심신이 허약해진다. 유례없는 세월호 참사로 평소 같으면 근심 없는 이 무수골에도 근심이 깊다. 추사(秋史)는 그의 나이 71세 때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와 오이와 생강과 나물이며, 최고의 행복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들과 함께 하는 것(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희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이라고 하였다. 평생을 살면서 죽기 전 새삼 깨우친 아름다운 인생의 진리다. 그럴진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잃었는데, 산해진미가 다 무슨 소용이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흙탕물이 가라앉아 저 무논 같은 평화가 깃들기를. 어린모와 같은 새 희망이 다시 자라나기를.
도봉산 원통사

- 우이암 아래 부처의 형상이 나타나는 바위들이 한데 모여 있는 천혜의 관음성지 원통사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마치던 날 천상의 상공(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배알하는 꿈을 꾸었다하여 상공암(相公岩)이라 새긴 바위도 있다. 원통보전을 중심으로 매단 연등에서 빛이 눈물처럼 괸다. ‘원통(圓通)’ 절대의 진리는 모든 것에 두루 통한다고 했다. 그 진리가 두루 미쳐 절망과 슬픔에 빛이 되기를.
우이암

- 우이암(牛耳岩)은 쇠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가끔 ‘티롤리안 브릿지(Tyrolean Bridge)’가 행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바위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노스님이 동자승을 품에 품듯 바라보고 있는 형태다. 주변의 바위들도 호랑이, 거북이, 코끼리, 두꺼비, 새 등 다양한 동물들의 형상이다. 모두 이 바위를 바라보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관음봉이라 불렀다. 그래야 저 아래 관음성지 원통사와도 맥이 닿는다. 우리가 소처럼 크고 깊은 귀를 가질 때 비로소 관음(觀音)에 이를진저.
도봉산 원통사 길목

- 원통사(圓通寺)로 내려서는 길목에 돌탑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노송은 그 길처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향기 어린 쉼터가 되었다. 돌탑은 정결한 마음의 형태가 소박한 바람으로 나타난 것이다. 돌탑은 우리네의 순박한 마음이다. 돌탑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순연해진다.
잠시

- 이렇게 몸 앉히면
마음 이리 고요한 것을
부산하던 생각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바위를 지키던 소나무는
일주문 되어
내 안에 아무 것도 들이지 않는 것을
바람이 솔솔 등을 어루만지면
제 몸에 달았던 솔방울 풍경도
더는 울지 않는 것을
내 지치고 가여운 영혼이 이리도
힘을 얻는 것을
오, 너 가난한 마음아 마음아
아파하지 마라
네가 곧 산이 될 것을
네 마음이 너를 알고 있느니
삼천사계곡에서 마음의 휴(休)를 얻다 (빛도 머물며 쉬어가는 그늘의 집)
삼천폭포

-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옷자락에 물방울이 튄다. 찾아온 이른 더위에 신갈나무 잎들이 만들어내는 초록의 바람이 솔솔 스며든다. 어느 새 저 그림 속에 들어가 물가에 앉는다. 어디서 왔는지어디로 가는지 까맣게 잊는다. 제가 누군지조차 잊은 신갈나무도 바짓단을 흠뻑 적시고 있다.
마실길의 느티

- 북한산둘레길 제9구간인 마실길에는 빛도 함께 머물며 쉬어가는 휴(休)가 있다. 수령 일이백 년을 훌쩍 넘긴 품 넓은 느티나무 보호수들이 그늘의 집을 지었다. 잠시 이 세상으로 마실 나온 사람들이 등짐을 벗어 놓고 쉬고 있다.
삼각산 삼천사

- 산은 높고, 골짝은 깊고 물은 맑다. 상서로운 기운 서린 봉우리들이 연꽃봉오리를 닮았다. 그 아래 법화사상의 한 핵심을 이루는, 우주의 삼천법도 모두 일념에 갖추어져 있다는 일념삼천의 교설을 반영한 삼천사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아쇼카왕 석주사사자상을 탑의 상륜부에 올린 세존진신사리 9층 석탑도 보인다. 삼천사동을 흘러오는 물소리가 만유를 씻긴다.
숙용심씨묘와 한옥마을 터

- ‘숙용심씨묘표’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5호다. 숙용심씨는 세조 즉위에 공을 세운 원종공신 심말동의 딸이다. 성종의 후궁이 되어 두 왕자와 옹주를 낳았다. 묘표는 북한산이 한눈에 보이는 작은 동산에 세워져 있다. 뿔이 있는 용을 구름무늬 속에 새긴 이수가 매우 아름답다. 비신은 백색인데 명품의 도자기에서 풍기는 빛깔이 감돌아 은연중에 숙용심씨의 인품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이 묘표에는 아픈 곡절이 있다. 흰 대리석의 빼어난 조각미에 반해 임진왜란 때 강탈당한 것이다. 일본의 ‘다카하시 고레키요 기념공원’에 안치되었던 것을 후손들의 노력으로 반환해 왔다. 길이 전해지기를.
삼천사 계곡 비류폭포

- 이백이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에서 노래한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의 기상이 엿보인다. 상단에 올라서보면 더욱 실감이 난다. 빼어난 의상능선의 봉우리들이 조망된다. 잠시 소요하는 구름을 벗하여 골짝에 걸린 산안개를 끌어다 덮는다. 발섭고산대천(跋涉高山大川)의 산수유람 끝에 찾은 선경을 즐기는 선인의 와유(臥遊)가 이만 못하리라.
삼천사마애여래입상(화첩)

- 대웅보전 오른쪽 마음의 모퉁이 돌아 오른다. ‘삼천사지마애여래입상’이 어머니처럼 반긴다. 보물 제657호다. 후덕한 금빛 미소에 이내 마음이 놀빛으로 물든다. 아침이면 아침놀빛으로, 저녁이면 저녁놀빛으로, 밤이면 별빛으로 그렇게 마음이 물든다. 물들어 미소 지을 때마다 환하게 꽃이 핀다. 마음의 골방이 구중궁궐 꽃 대궐 된다.
사패산에서 특별한 하루 휴가를 보내다 (엠티 가던 시절 추억의 찻길 따라 오르는 망바위)
사패산에서 본 도봉과 북한산

- 전망이 자유롭다는 것, 그것은 미래를 보는 일이다. 과거 없는 현재 없고, 미래 없는 현재는 상상할 수 없다. 사패산 정상에 오르면 우리의 과거가 보인다. 오늘에 선 나의 모습이 보이고, 미래가 보인다. 막힘없는 높은 안목을 얻는다. 사방팔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리의 시선이 자유롭다. 사패(賜牌)란 임금이 왕족이나 공신에게 산판이나 논밭 따위를 주거나 그 사실을 적은 문서를 말한다. 이 사패산에 오르면 하늘이 우리에게 그런 사패를 준다. 미래로 뻗친 정신의 안목을 약속한다.
원각제이폭포

- 여름날의 각별한 하루다. 더위를 피해 찾아 들어간 숲에 폭음(瀑音)이 울울하고, 서늘한 폭풍(瀑風)에 오히려 한여름이 으스스 춥다. 가만히 보니 중나리와 하늘말나리 나리꽃 일가가 먼저 와서 가족 단위의 피서를 즐기고 있다. 시 한 수 읊조리고 있다.
벼락으로 꽂히며
천둥 치는 한 문장
산을 울리고
들을 적시며
먼 바다까지
풀고 풀어서
밤낮 없이 홀로 가는
긴긴 강물
- 「원각폭포」
물푸레나무와 평상바위

- 숨이 턱에 닿을 쯤 마침 만나는 평상바위다. 그 옆에 선 물푸레나무 발등 위로 불어난 계곡물이 넘는다. ‘여기 앉아서 쉴 줄 모르면 바보다. 잠깐이지만 휴식의 즐거움을 알 리 없다.’ 일하기 위해서 살기보다는 휴식하기 위하여 일하라는 나무의 조용한 전언이다. 주인을 벗어던지고 주인이 되어 쉬고 있는 두 배낭의 휴식에 절로 몸과 마음이 평화를 얻는다.
사패산 원각사

-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곳이 송추다. 서울을 벗어나 교외로 나서는 그 순간부터 마음이 설레는 건 지금도 비슷하다. 과거 교외선을 타고 일영, 장흥, 송추 등으로 일상을 탈출하며 젊음의 특권을 누리던 때가 있었다. 송추는 그런 추억의 장소다. 원각사로 가는 길은 다시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성찰과 휴식의 시간이 된다. 스스로를 치유하는 특별한 하루 휴가가 지친 현대인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사패능선에서

- 오른쪽에 앉으면 멀리 북한산의 원경이 보이고, 왼쪽에 앉으면 도봉산줄기가 들어오는 비밀의 쉼터다. 한쪽은 햇볕이고 반대쪽은 그늘이다. 앉아도 좋고 누워도 좋다. 다시 오지 않을 지금의 이 순간이 모처럼 삶의 유한성을 벗어나 절대적 시간의 영원성에 잠시 몸 기대고 있다.
사패산 갓바위

- 천보산 방향으로 사패산 정상 가장자리에 두어 평의 소나무 그늘이 있다. 그늘에 앉으면 바로 앞의 갓바위가 코앞이다. 다른 방향에서 보면 송이처럼 보여 송이바위라도 부른다. 세상을 근심 없이 내려다보는 품새가 무명의 번뇌를 벗었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저 바위와 저 소나무의 휴(休)를 내 안으로 들인다. 잠시 하나의 바위가 된다.
영봉에서 인수봉의 금언을 듣다 (마음속 그 고요한 절로 가는 길)
용덕사 길목

- 용덕사 가까이 소나무 사이로 난 단아한 돌계단이다. 반음계와 온음계를 적당히 섞어 만든 것일까. 몸과 마음이 아름다운 음계를 따라 변주되며 열리는 느낌이다. 어느 곳이든 절로 가는 길은 언제나 이렇게 직접 걸어서 갔으면 좋겠다. 걸음은 때때로 굳은 우리의 몸과 엉킨 마음을 풀어준다.
북한산 용덕사

- 작다고 작은 것이 아니다. 좁다고 좁은 것이 아니다. 아기의 키가 작은가, 아니면 연씨가 든 오밀조밀한 방이 좁은가. 수려한 영봉 줄기를 뒤로한 가람은 단출하고 검박해서 마음이 넓어진다. 더군다나 만월로 뜬 ‘마애약사여래불’의 미소가 흰 달빛이다. 중생의 그 어떤 병고도 능히 낫게 해줄 빛이다.
북한산 상장능선과 도봉산

- 영봉능선의 봉우리에서 보는 우후청산의 그림 같은 산경(山景)이다. 좌측 왕관봉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한북정맥의 일부인 상장능선이 하늘에 유려한 마루금을 그었다. 오른쪽으로는 도봉주능선이 멀리 자운봉으로 이어져 있다. 우이령길 건너 도봉산까지 시원하게 열린 공간이 후련히 가슴을 터준다.
영봉에서 본 인수봉

- 인수봉의 웅장한 암벽이 압권이다. 누구든 그가 산사람이면 흠모하지 않을 수 없으리. 지상의 기운이 모이고 하늘의 서기가 어려 있다. 멀리 대남문까지 시야가 열렸다. 함께 했던 산우(山友)들의 얼굴이 보인다. 우렁우렁한 음성들이 들린다. 산이 있어 서로의 산이 되는 사람의 산인 그대들이 문득 그립다.
자주조희 풀과 달

- 낙엽떨기나무를 누군가 목단초牧丹草라 부르고 풀이라고 불러도 미소만 짓는 아무 산에서나 살지 않고 아무 절에서나 꽃피우지 않는 절집 보살.
영봉능선 소나무

-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산정의 바람 아니면 저 소나무는 이 땅에 없는 나무네. 모진 비바람 다 받아내지 않았으면 저 소나무는 이 세상에 없는 나무네. 갈지(之) 자는 소나무가 허공을 기는 보행법이네. 삐뚤빼뚤 산 것이 아니네. 삶이 그런 것이네. 생사의 경계가 그런 것이네. 우리가 한 번 엎어져보면 알게 되네. 깨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선인(仙人)의 장엄한 도봉 오색 비단을 입다
도봉산 들머리

- 도봉동문(道峯洞門)은 우리가 잊은 마음의 동천(洞天) 입구에 있는 문이다. 그렇지 않고야 산을 나서는 물빛이 저리 칠보의 빛깔일 리가 없다. 느티나무 단풍나무 오리나무 참나무, 나무란 나무들이 단사청확의 고운 옷을 입을 리 없다. 자신이든 누구든 사랑하지 않고는 저리 고울 리 없다.
도봉산 천축사

- 천축사의 천축(天竺)은 천축국의 영축산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거대한 흰 암벽과 어우러진 절대 수승의 절경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옥천암 암반에서는 감로수가 솟는다. 대웅전에 모셔진 ‘천축사목조석가삼존불’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7호이다. 좌우의 협시불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모신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불상이다. 사찰은 단풍 속에 파묻혀 있고, 옥골선풍의 흰 암벽은 선인(仙人)의 모습 그대로다.
신선대에서 본 자운, 만장, 선인봉

- 신선대에 서면 말이 필요치 않다. 말을 잊어서 반인반선(半人半仙)이 된다. 사람의 발길을 밀어내는 자운봉은 웅혼한 바위성채다. 아무렇게나 쌓은 듯 그러나 가만히 보면 기하학적 구조의 극적인 미가 포진해 있다. 만장봉과 선인봉 또한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비경의 수묵화다. 비속(非俗)한 선경의 세계가 끝없이 우리의 정신을 장엄한 세계로 이끈다. 높이 나는 새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도봉서원 계곡

- 계곡의 바위에 새겨진 고산앙지(高山仰止) 각자가 보인다. 시경(詩經) 소아(小雅)편에 수레 굴대빗장 ‘거할(車舝)’이라는 시가 있다.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신랑이 신부를 맞으러 가는 신행길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다. 그 말미에 ‘고산앙지(高山仰止) 경행행지(景行行止), 높은 산은 우러르고, 큰길을 간다’고 했다. 천장만장 드높은 도봉과 정암 선생의 학문과 인격이 그러하리라. 글씨를 바라보는 뜻이 그러한 흠모이기를.
도봉에서 본 북한산

- 산 너머 산 있고 산 아래 세상 있다. 그 산 그 세상 산에 와야 보인다. 내가 보이고 네가 보이고 세상 너머 세상 보인다. ‘간수간산간인간세(看水看山看人看世), 산수를 보고 사람을 보며 그를 통해 세상을 본다.’ 산이 되고자 하는 내게 오늘도 산이 남명 선생의 말씀을 전한다.
신선대 길목 소나무

- 저 선인봉 흰 바위 앞 소나무 아래 앉으면 윤두서의 송하선인도(松下仙人圖)가 따로 없겠다. 앉아서 솔바람을 쐬도 좋을 것이요 책을 읽으면 더 좋을 것이요 유하주를 마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저 자리 놔두고 다들 어디로 갔는가. 마음껏 나를 상정해볼 수 있는 여백이 빛이다.
고독하게 빛나는 숨은벽 능선의 진경에 들다(밤골을 떠나는 가을의 향기)
숨은벽의 가을

- 숨은벽능선은 거대한 삼각파도의 칼등이다. 거침없이 깎아지른 수직 절벽의 아찔한 고도감이 생생하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날등은 미미한 존재의 실존을 여지없이 흔든다. 볼수록 비장미(悲壯美)에 전율감이 엄습한다. 절벽의 소나무가 백운대 북사면에 불붙은 절정의 가을 단풍에 벼랑을 잊었다.
산부추와 가을 빛

- 와폭에 흐르는 가을 물살이 여위었다. 보랏빛 산부추는 막바지 가을축제에 빛의 폭죽을 터트리며 불꽃놀이를 즐기고 있다. 붉나무는 붉을 대로 붉어져 더는 태울 것이 없다. 계곡의 소나무가 떠나는 가을을 배웅하고 있다.
숨은폭포의 가을

- 숨은폭포는 제 물소리에 몸을 들키고, 숨은벽은 세상 사람들의 입에 의해 들키고 말았다. 폭포와 숨은벽능선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 망바위에 올라선다. 비경이 처음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단풍의 빛은 금수능라와 같이 화려하고, 폭포는 비단폭이다. 산을 바라보는 마음마저 물들어 그대 눈동자에 빛나는 오색 광채, 또 하나의 진경을 본다.
해골바위와 달

- 해골바위 퀭한 눈에 달이 뜬다. 고였던 간밤의 빗물이 잘름거린다. 조금은 기괴했던 바위가 생명력을 얻어 만월의 눈동자로 바뀐다. 광년 너머의 어둠까지 이르는 시력으로 세상 만물을 본다. 해골바위가 얻은 만월의 시력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지독한 근시안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북한산 숨은벽 능선

- 숨은벽은 인수봉과 백운대 사이의 은일한 세계에 있다. 자신의 고독을 숨긴 채 북한산 제일의 비경으로 세상과 일정 거리를 두고 있다. ‘나다움’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숨은벽은 말해주고 있다. 카이르마야 사하 요다비암?(kairmaya saha yoddhavyam). ‘아르주나’는「바가바드 기타」에서 우리에게 묻고 있다. 깨어 있는 자는 남과 싸우지 않는다. 숨은벽은 은자를 넘은 현자이다. 가히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지혜의 빛을 품은 진경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숨은벽 능선에서 본 노을

- 석양의 노을빛을 받아 천지가 물들었다. 금빛 바위를 등지고 단애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본다. 이 순간만큼은 부처의 세계가 따로 없다. 극락정토가 딴 데 있지 않다. 마니산 너머 강화바다로 지는 이 우주의 홍옥이 그걸 말하고 있다. 지금 여기가 피안이다. 두 발로 숨차게 도착하여 평정을 찾은 이곳.
오봉능선 여성봉이 품은 우주의 신비에 젖다(말을 버린 송추계곡의 적묵(寂黙))
도봉산 송암사

- 겨울은 모두 소리를 낮춘다. 물살 소리 낮춰 흐르는 계곡의 다리를 건넌다. 손수 일주문도 고치고 눈도 쓸고, 어긋난 마음도 고쳐주고 쌓인 것들도 치워주는 스님이 계시는 절이다. 법당을 향하여 몸 굽히고 있는 커다란 소나무처럼 마음 굽힐 줄 알아야 뭔가가 보인다고 일러주지 않아도 알게 된다. 가람 뒤로 솟은 여성봉이 몸 둥글게 말아 이 세상 품듯이. 이 세상 바라보듯이.
오봉능선 오봉대에서

- 눈이 한 번에 열리고, 바람이 수정처럼 맑다. 마가목 빨간 열매가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가을을 완성하고 겨울을 맞는 곳이다. 비밀은 비밀이므로 거기가 어딘지는 정확히 아는 이 없다. 좌측으로 여성봉, 정면으로는 사패산, 오른쪽으로는 포대능선을 따라 자운봉과 만장봉 등이 부채꼴 모양으로 나를 중심에 두고 휘감아 온다. 이 비밀한 한가운데 있을 때 세상 어디에도 나는 없다. 아무도 모르는 내 부재의 하루가 여기 있다. 깊고 맑은 침묵 하나로 산과 하늘과 소통하는 그런 곳 있다.
낙엽

- 낙엽을 데리고 가는 바람, 가을을 데리고 저만큼 가는 낙엽. 낙엽은 겨울 산이 춥다는 걸 안다. 바람은 낙엽들이 겨울 산의 이불이 됨을 안다. 봄날의 초록으로 왔던 바람이 갈빛 바람 되어 겨울로 가고 있다. 뼈까지 차가운 겨울이다. 따뜻하게 손 잡아줄 그대의 손이 그립다. 한 줌 체온을 전해주려 손을 꼭 오므린 낙엽들.
도봉산 오봉과 북한산

- 오봉에 선다. 변역과 불역의 세계가 바로 앞에 극명히 펼쳐져 있다. 경치로 보아도 단연코 백미의 절경이다. 볼수록 황홀경이다.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경쾌하고, 새롭다. 질서와 변화가 극치를 이루었다. 상장능선을 배경으로 도열한 모습은 수 세기만에 정렬에 드는 어느 행성들의 모습이다. 멀리 드높은 북한산 봉우리마다 상서로운 기운들이 몰려들고 있다.
오봉능선에서 본 북한산

- 여기 오면 보인다. 보물 제199호로 지정된 경주 남산 봉화골 신선암 마애보살상이 보인다. 드높고 웅혼한 북한산의 산세를 바라보는 각도도 흡사하다. 크기며 숙어진 각도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2010년 2월 현석 이호신 화백의 ‘천불만다라’전에서 전시되었던 기억 속의 그 작품이 보인다.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민바위지만 언젠가 분명 바위 속에서 나올 미륵불이 보인다.
솔바람 속에서

- 소나무 없는 벼랑은 그냥 죽음의 벼랑일 뿐이다. 그 벼랑을 극적인 삶으로 바꾸는 건 소나무뿐이다. 오봉능선 바위벼랑 아래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 저들이 품은 벼랑이 보인다. 그 벼랑에 세운 꿈과 희망이 보인다. 일찍 찾아온 겨울은 길 것이므로 솔빛 또한 푸름이 길겠다.
여성봉 바위에서 본 오봉과 북한산의 밤

- 아팠던 만큼 울음은 붉었다. 슬펐던 만큼 고독은 깊었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있다. 그런 우리를 품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누가 우리를 품어줄 것인가. 이 땅에 어머니 말고 또 누가 있는가. 여성봉은 어머니다. 여성봉 바로 아래 치맛단 같은 바위에 등을 대고 누워보시라.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궁륭의 하늘이 열린다. 조금 전 올해의 마지막 석양은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물들이고 바다로 졌다. 남은 것은 어둠이다. 그 어둠의 하늘을 어머니가 열어주신다. 위무해주신다.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 어머니의 말씀이요 신의 음성이다. 내 눈물로 빛나기까지.
백운대의 일출 온누리에 새날의 빛을 뿌리다(신새벽과 새날을 함께 맞는 서울의 명산)
노적봉과 중성봉

- 돌올한 바위봉우리, 노적봉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금강의 기운을 받는다. 하늘에 우뚝한 기상과 묵중한 침묵이 세상의 소란과 말들을 지그시 눌러버린다. 저 고절한 정신의 세계로 가는 문인 양 중성문이 기다리고 있다.
원효봉의 새벽

- 고단한 민초들의 삶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하늘에 걸린 만월의 외등 하나 미로 같은 삶의 꿈길을 골목골목 비추고 있다. 다시 또 하루가 열리고 있다. 삶을 부양하는 저 민초들의 건강한 노동과 꿈과 희망에 의해서 새날의 아침이 열리고 있다.
백운대와 인수봉

- 백운대 정상에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인다. 삼일운동 암각문이 새겨진 곳이다. 단순한 서울의 명산이 아니다. 우리 민족정신의 성지다. 경천애인(敬天愛人), 바위에 새긴 글씨처럼 하늘을 더 공경하고 사람을 더더욱 사랑해야 한다. 민족혼을 새롭게 가다듬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성지로 거듭나야 한다고 태극기가 펄럭인다.
북한산 덕암사

- 덕암사 종소리
나를 치고
멀리 가는 종소리
서쪽 하늘마루 넘다
붉은 놀로 앉아
다시 나를
바라보는 종소리
북한산 백운대 해돋이

- 서설이 먼저 왔다. 대지 위로 솟는 태양, 새해 새날을 여는 장엄한 해돋이다. 어둠이 머물렀던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빛이다. 을미년 새해 모두가 복을 짓고, 건강하고 소망 이루는 빛이 되기를. 인수봉도 함께 간구하고 있다.
산영루의 겨울

- 새로 복원한 산영루(山映樓) 기왓골에 눈이 소복하다. 넓은 암반 위로 얼지 않는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멀리 흰 눈 쌓인 의상능선은 절개 곧은 옛 선비들의 드높은 정신이다. 그들이 남겼던 시문들이 서설로 빛나고 있다. 동천(洞天)의 문장 되어 큰 강 향해 흐르고 있다.
포대능선의 겨울 회사후소의 세계가 눈꽃으로 피다(침묵의 정점에서 이루어지는 장엄한 바위봉우리들의 경건한 기도)
포대능선에서 본 도봉

- 붉은색 머금은 보랏빛 구름 걸린 자운봉(紫雲峰)에 상서로운 기운이 천지에 뻗친다. 한 점의 미혹도 의심도 없다. 하늘과 통한 고도한 정신의 세계가 절정에서 빛나고 있다. 누구일까? 잃어버린 마음의 명경을 찾아 제 얼굴을 보고 세상으로 가는 이가.
도봉산 만월암

- 적설의 고요가 깊다. 발목까지 푹푹 빠진다. 누가 저 길을 걸어갈까. 바람일까, 아니면 선인봉 아래 문 열고 마실을 가시는 석굴암의 부처님일까. 월정(月精)의 달빛 사리는 보석으로 쏟아지고, 그 소리 듣고 계신 만월보전의 부처님 흰 미소가 마음의 심매(心梅)로 핀다.
도봉산 포대능선에서

- 산정의 저 소나무 천길 바위 벼랑에 몸을 세웠다. 우리의 삶 어디엔들 벼랑이 없으랴. 벼랑에서 일어서면 벼랑은 정신이 된다. 정신의 지평이 열린다. 삶은 어디냐의 문제보다 무엇이냐의 문제가 그 사람의 한 생애를 좌우한다. 벼랑에서 소나무를 키워온 부부가 소나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벼랑의 설송

- 그 무엇 하나 제 것 내주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바람에게도 대설에게도 때때로 내주어야 할 것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람의 방향을 안다. 눈의 무게를 안다. 내준 만큼 넓어지고 깊어진 내면세계가 비로소 온전한 그의 세계요 우주가 된다. 중동을 내준 소나무가 길 없는 절대적 세계 속에 하늘을 얻었다. 사뿐 눈송이 받은 손바닥 위에 흰빛이 소복하다.
선인봉과 소나무

- 진실로 좋으면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다. 더는 바랄 게 없다. 석굴암 가는 길목 누구라도 앉아 쉬기 좋은 바위 쉼터가 있다. 한 번 앉아서 저 거벽의 선인봉 바라보고 있노라면 좀처럼 일어설 줄 모른다. 길을 가던 저 소나무도 쉬어간다는 것이 그길로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주저앉았듯.
선인봉과 포대능선

- 천축사 갈림길에서 오른쪽 석굴암과 만월암 가는 길로 접어들면 아주 오래된 도봉산장 있다. 안으로 들면 머리에 만년설을 머리에 인 할머니 한 분 계신다. 반질거리는 그라인더로 내려주시는 원두커피의 향기가 잠시 고독의 시원을 더듬는 시간이 있다. 침묵으로 사람을 듣는 그런 시간이 있다.
백화사계곡 겨울을 깬 해빙의 물소리가 미소로 벙글다(금빛 햇살 머금은 삼존불의 흰 미소와 봄이 오는 소리)
가사당 암문

- 암문에 서있는 두 소나무가 예사롭지 않다. 옛 북한산성의 수비를 맡았던 삼군문(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주둔부대인 유영(留營)의 병사를 보는 것만 같다. 북한산의 강건한 기운을 받아 늠름하다. 역사와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북한산이 도시를 품었다. 지친 현대인을 위무해준다.
백화사 마애삼존불과

- 요가를 하듯 제 무릎 비틀고 다시 몸 일으켜 세운 소나무 한 그루, 삼존불의 솔 우산이 되었다. 그 마음을 안다. 목화처럼 흰 미소가 세 부처님 얼굴에 가득하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르는 것들은 우리의 상상과 일상을 뛰어넘는다. 빛에서 빛으로 건너가는 마음이 보인다.
북한산 백화사

- 의상봉은 높고 원효봉은 넓다. 높은 것은 지평 너머를 보는 정신이고, 넓은 것은 세상을 품는 원융무애의 마음이다. 그 두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들어선 가람은 맑고 고요하다. 고요한 것들의 움직임이 들린다. 소나무와 삼존마애불이 듣는 꽃봉오리 벙그는 소리가 환하다.
북한산 백화사계곡

- 범바위는 제 몸의 흰빛으로 세상의 삿된 기운을 멀리 밀어내고, 소나무는 청청한 사유를 청음의 문장으로 풀어서 제 목소리를 세상으로 전한다. 그 소리 세상에 닿아서 시끄러운 사람의 소리와 섞이기 전 먼저 들으려 바위에 앉은 산인(山人)들 선인의 경계에 걸쳐 앉았다.
북한산 의상능선에서

- 국녕사 큰 부처님 이마는 낮달이 비추고, 부처님 이마의 빛은 온 산을 비춘다. 덕암사, 상운사, 대동사, 노적사 무명을 밝히는 범종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 하늘은 가없이 높고 끝없이 깊다. 무량(無量)한 대적(大寂)의 고요는 장엄한 흰 빛의 산봉우리로 솟았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진 유현한 세계가 명경지수처럼 맑아 눈이 시리다.
의상능선의 솔숲길

- 정(靜)하면 동(動)하고, 동(動)하면 정(靜)하는 신명의 춤사위다. 움직이고 있으나 멈추어 섰고, 멈추어 섰으나 움직이고 있다. 천명을 들어서 허공을 딛고 하늘로 오르는 몸짓이 자유롭다. 나아가고 멈춤이 물과 같다. 솔향기 번지는 숲길의 소실점 너머로 멀어져가는 길손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다락능선의 봄, 환상의 무대에서 연둣빛 왈츠를 듣다(봄비에 하늘 열어 움튼 희망의 새싹들)
다락능선에서 본 포대능선

- 바위는 아무리 읽어도 좀처럼 책장이 낡지 않는 고전이다. 꼼꼼히 밑줄을 치며 읽는 금언이다. 읽을수록 의미는 더 여물어 단단해지고 커지며 깊어진다. 그러한 바위들이 도열한 포대능선은 육체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이 읽어야 할 수승한 빛의 세계다. 소나무와 진달래가 미혹을 씻고, 무명을 활짝 벗었다. 빛은 빛으로 통할 뿐이다.
도봉산의 봄

- 침묵을 펴면 환한 말들의 미소가 햇살처럼 퍼진다. 꽃은 꽉 쥐었던 침묵을 폄으로써 꽃의 말을 향기로 우리에게 전한다. 그렇게 봄은 만물의 미소와 말로 우리의 마음을 펼친다. 멀리 북한산의 하늘로 불어가는 꽃바람이 중중모리로 봄을 몰아가고 있다.
도봉산 대원사

- 실낱같던 계곡물이 봄비를 만나 한 소리를 얻었다. 솰솰 거리는 계곡의 청류는 한 문장을 거침없이 달필로 써대고 있다. ‘수류경귀해(水流景歸海) 월낙불리천(月落不離天는), 물은 흘러 바다로 돌아가고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
도봉산 심원사

- 다락능선의 첫 봉우리를 배경으로 자리 잡은 작은 절이다. 단출하여 시끄럽고 복잡했던 마음이 이내 잔잔해진다. 봄비 속에 꽃망울을 터트린 진달래가 곱다. 미륵불입상의 입가에 도는 미소에 진달래꽃 꽃물이 들었다. 실컷 맞아도 안 아픈 건 봄비 밖에 없다. 사랑이니까.
도봉산 통천문

- 뿔은 아무나, 아무 것이나 치받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작정하고 써야 할 때가 있다. 꽉 막혀 더는 출구가 없을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상황에 놓이면 뿔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다. 막장 같은 어둠의 벽을 뚫을 그 뿔 하나 갖기 위하여 우리는 정신을 벼린다. 벼리고 담금질하여 단단한 쇠로 만든다. 언젠가 가로막힌 바위덩어리 제대로 들이받기 위하여.
소나무와 진달래

- 바위 위에서 오체투지로 나아가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 볼수록 숙연하다. 항상 그 자리 같지만 제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얼마만큼 앞으로 나아갔는가. 매일매일 엄청난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알고 보면 우리는 항상 제자리다. 그 자리가 그 자리다. 소나무의 걸음은 우리의 보법이 아니다. 우주율의 발걸음인 것이다. 적어도 소나무는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없다.
신들의 정신이 깃든 북한산 성채, 칼바위능선에서 보다(눈과 귀를 씻는 정릉계곡의 나무비와 물소리)
칼바위 능선과 북한산 성채

- 북한산 총사령부의 위용이다. 기상이 웅혼하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신들이 거처로 삼았을 법한 곳이다. 수도 서울을 넉넉히 품어준 가없는 세계의 축복이 충일하다. 우리 민족의 면면한 숨결과 양양한 미래가 보인다.
정릉계곡 상담폭포

- 나무가 계곡을 가로질러 건넜다. 덩굴식물이 땅을 기는 동안 상목(桑木)은 푸른 정신으로 허공을 밀고 나갔다. 폭포의 물줄기는 소리로써 소리를 지운다. 바위에 앉은 길손은 고요로써 고요를 듣는다. 만뢰(萬籟) 속에 공명의 화음이 드맑다.
북한산 칼바위

- 깎아지른 바위절벽, 아찔하다. 일상에 안주한 느슨한 우리에게 고도의 긴장감을 준다. 발밑을 살피게 만들고 걸음에 집중시킨다. 또한 우리를 멀리 보게 한다. 그게 칼바위의 미덕이다. 멀리 본 만큼 봉우리에 부는 바람이 시원하다. 눈과 가슴이 열려 비로소 북한산 최고의 전경을 보게 한다.
삼각산 태고사

- 천년 고찰의 향기가 난다. 귀룽나무 야광나무 꽃 색이 빛난다. 깊은 산사의 침묵이 투명하다. 향기와 색깔과 침묵이 화합하여 천지 사방 만물이 각각 제 빛으로 감응한다.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세 봉우리가 빚은 고요한 무념의 경지가 대덕 고승의 흰 빛이다. 낮달이 하늘에 낙관을 찍었다.
소나무와 달

- 마음이 원치 않으면 그 길을 버린다. 그것이 소나무가 생각하는 길에 대한 예의이다. 소나무는 왜 그토록 바위 절벽에 내는 길을 바랐던 것일까. 수도 없이 일어나는 마음의 질문을 꺾고 꺾으며 허공에 내는 길을 원했던 것일까. 마음을 담은 길은 아름답고, 정신을 담은 길은 도가 된다. 달빛에 드러난 소나무의 무도(舞蹈)가 도(道)다.
북한산 칼바위 능선에서

- 정릉에서 올라 꼭 한 번 들렀다 가는 바위다.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대성문에서 보현봉으로 길게 이어진 산성은 아름답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평화롭다. 칼바위는 우리에게 날을 세우지 않는다. 일에 지친 우리들의 심신을 위무해주고 범상치 않은 좋은 기운을 기꺼이 준다. 우리가 바위에 대한 겸손만 잃지 않는다면.
범골능선에서 우리 역사의 상흔과 미래의 보루를 보다
도봉산 범골능선 쉼터

- 맑음은 빛이 되고, 고요함은 거울이 된다. 빛이 거울에 비쳐 반사되니 만물이 티끌을 씻었다. 천지와 일통한 소나무가 넉넉히
세상을 품었다.
도봉산 석굴암의 밤

- 두 바위가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절묘한 각도로 묵중하게 기울었다. 기울어 빗장 없는 불이문이 되었다. 안팎 없는 마음의 경계에 달이 드높다.
호원동 회화나무

- 한 번도 꺾이지 않는 나무는 없다. 나무가 바람을 아는 까닭이다. 나무가 하늘을 듣는 귀를 갖게 된 이유이다. 나무에게 올린 막걸리 한 병의 예가 흐트러짐이 없다.
회룡사와 회룡폭포

- 바위는 물을 맑게 하고, 물은 바위를 정결히 빛낼 뿐이다. 폭포가 쏟아내는 물소리는 취선당 선방을 쓸고, 소리 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 열고 달아나는 바람이 된다.
도봉산 회룡계곡

- 단아한 폭포로 계곡은 빼어난 풍광을 얻었다. 절벽의 바위는 소나무와 벗하여 지음(知音)이 되었고, 폭포를 통해 이이(俚耳)를 벗어났다. 움직이지 않아서 모든 움직이는 것들을 듣고 있다.
범골능선에서 본 일출

- 제1보루에 허공에 옆으로 누운 소나무 있다. 일월성신의 빛을 받으며 일신을 푸르게 지켜온 정신이 있다. 이 땅의 소나무로서 지킨 정신, 정신이 보루다.
문사동계곡에서 스승을 찾아 세상의 길을 묻다
도봉산 가학루에서

- 무심까지 비치는 물 맑은 계곡이다. 용주담엔 진주알 물방울 보석들이 연신 자글거린다. 고산앙지 경행행지, 청류와 드높은 흰 바위는 그 뜻을 세상과 하늘에 전하고 있다. 가학루에 앉으면 선인이 된 도봉의 늙은 나무꾼이 들려주는 청려한 시가 물이 되어 흘러가는 모습이 명징하게 보인다.
도봉산 구봉사와 서광폭 계곡

- 복호동천 지나면 구봉사다. 서광폭까지 이어진 층층의 폭포는 쉴 새 없이 소리로써 소리를 지운다. 지워서 소리 없는 마음에 의심이 없다. 의심이 없어 맑고 투명하다. 천지만물이 화락(和樂)하여 일체불류(一切不流)의 도를 이루었다. 붙듦도 없고, 붙들림도 없다.
도봉산 용어천계곡

- 옛 임금의 자취 서린 곳이다. 허공을 단번에 쓸어내린 훤칠한 바위는 거칠 것이 없다. 소나무만 절벽에서 그 홀로 푸르고, 계곡물은 물푸레나무 발등을 솰솰 넘어 흐른다. 여름날의 더위를 쫓는 나무들의 탁족, 청량한 청산하일(靑山夏日)의 하루가 아득히 세상을 잊었다.
도봉산 제일동천

- “동중즉선경(洞中卽仙境) 동구시도원(洞口是桃源), 골짝 안은 선경이요 골짝 어귄 도원일세.” 이 골짝은 어딘가. 도봉산 제일동천임을 모르지 않네. 이 세상 어딘가 은거한 어느 가인과 선인이 있어 나는 산을 꿈꾸고, 산은 사람을 꿈꾸네. 누군가의 미소 속에서 이따금씩 흐르는 산복사꽃 있네.
도봉산계곡 문사동에서

- 스승을 찾아 깊숙이 들어간 문사동(問師洞)계곡이다. 스승을 찾아가는 길은 얼마나 기쁜가. 스승은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네. 드높은 안목으로 먼 바다를 보여주는 전망이네. 산도 스승이고, 질문 또한 스승이네. 깊숙이 들어가 만나는 빛이네. 깊고 긴 마음의 골짝 끝에서 만나는 참 스승이네.
도봉산과 하늘바다

- 우이암, 칼바위, 뜀바위, 선인봉, 만장봉, 자운봉, 연기봉, 칼바위능선, 사패산까지 단박에 펼쳤네. 하늘은 가없이 열리고, 구름은 쉼 없이 흘러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도봉의 하늘이네. 좌에서 우로, 동에서 서로 가로지른 드넓은 창낭(滄浪)의 바다네. 도도한 정신의 물결이 높기만 하네.
상장능선에서 도봉산과 북한산의 미래와 희망을 읽다
북한산 상장능선에서

-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다. 우리가 심미성을 발견하고 정서적 안정감을 얻을 때 그 미적거리는 최적을 확보한 셈이다. 또한 그때 우리는 깊은 숨을 쉴 수 있는 내면의 공간화도 동시에 성공을 거둔다. 북한산 상장능선이 그렇다. 장엄한 북한산을 바라보는 소나무가 그걸 잘 알고 있다.
북한산 만지송

- 시간의 길이다. 바람의 길이다. 시간을 따라 흘러간 사유의 흔적이다. 하나의 뿌리에서 길어 올린 한 생각이 커다란 그물망을 형성하여 포획되는 시간이다, 바람이다, 세계다. 정작 소나무는 지금 그것들의 밖에 있다.
북한산 상장능선과 도봉산

- 강한 기운과 함께 저돌적 힘이 느껴지는 상장능선은 승황이란 상상의 동물을 닮았다. 그 기세를 알아 소나무가 슬쩍 옆으로 몸을 피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도봉산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북한산의 무엇을 보고 저리 달려가는지 모르지 않는 눈치다.
북한산 왕관봉의 밤

- 빛나는 별들의 소리가 가을 풀벌레 소리처럼 맑다. 맑다 못해 반짝반짝 귀에서 빛난다. 왕관봉에 오른 만월도 가만히 듣고 있다.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별들의 소리와 고단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등을 켜고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상장능선 소나무와 북한산

- 바람이 없어도 바람을 만드는 소나무다. 소나무에게 바람은 목숨이다. 목숨의 값이다. 세상에 침묵이 없어도 바위는 침묵을 만든다. 바위에게 침묵은 바위의 목숨이다. 목숨의 값이다. 소나무가 바람을 만들 때 바위는 침묵을 깬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 그 값을 알기 때문이다. 소나무와 바위가 함께 있는 까닭이다.
상장능선에서 본 북한산 노을

- 석양이 덕양산을 미끄러질 때 한강물은 넘치고 하늘은 장엄한 노을로 불탄다. 눈물이 나도록 섧고 아름답다. 아직도 산을 내려가지 못하고 바라보는 저들은 누구인가. 소나무와 북한산의 봉우리들도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티끌마저 완전 연소된 텅 빈 마음의 서쪽 하늘에 샛별이 뜰 시간이다.
청담골로 숨어든 여름 청량한 은일의 하루를 보내다
박태성묘와 호랑이묘

- 근원이 깊은 물은 맑고, 오래 멀리 흐른다. 하늘도 감동한 만대에 귀감이 되는 효(孝)는 세상에 회자되어 그 빛을 발한다. 비문을 쓴 박태성의 증손 박윤묵 또한 군자이자 송석원시사의 동인으로 그 이름을 떨쳤다.
북한산 북문길 청담송

- 노고산을 바라보며 바위에 선 소나무의 침묵이 청담(靑潭)이다. 정오의 햇빛을 받아 소나무가 드리운 그늘 또한 푸른 못이다. 나무 아래 앉으니 마음의 이 방 저 방, 몸이 골 저 골 시원하지 않은 곳이 없다. 정신의 골방까지 청량해지는 납량(納凉)이다.
북한산 상운사의 밤

- 어둠이 어둡지 않은 어둠이다. 어둠이 빛을 얻어 명징해진 어둠이다. 적막 속에서 드러나는 맑고 깊은 고요가 투명하게 비치는 어둠이다. 만상을 비추는 달이 무명을 씻어낸 어둠이다. 그윽한 마음의 세계가 무게 없는 빛이다.
북한산 원효봉에서

- 원효봉은 둥글다. 둥글어 세상을 유감없이 보는 원융무애의 고배율 확대경이다. 구름은 자유롭게 흐르고, 바람은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는다. 붙들린 것이 없으니 붙드는 것도 없다. 봉우리 봉우리 바라보는 세상이멀리 도봉산 너머까지 가없이 펼쳐졌다.
북한산 칠유암계곡

- 고려의 평장사 민지가 여섯 명의 지인과 더불어 시회를 열며 놀았다는 칠유암(七遊岩)이다. 북한산성계곡을 지나며 무심히 지나치는 이들이 많다. 가만히 바위에 귀를 기울이면 아름다운 절창의 시가 들린다. 달이 걸어가는 소리며, 성문 위로 지나가는 구름 소리며 무심한 것들이 그렇게 들린다.
청담골폭포

- 극심한 가뭄 끝에 비가 내린 청담골폭포가 모처럼 구성진 물줄기를 쏟아낸다. 폭포 소리는 곧 우리가 들어야 할 하늘의 음성이다. 조용히 말할수록 깊이 들어야 한다. 염초봉과 숨은벽, 멀리 인수봉이 말없이 듣고 있다. 잘 들을 줄 아는 것이 큰 미덕이라며.
하늘을 떠받친 도봉산의 주봉, 단청의 빛을 입다
도봉산 성도원 길목

- 스핑크스를 연상케 하는 바위다.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단풍은 한 해를 치열하게 산 나무들의 축제다. 봄을 알리고 여름을 구가했던 나무들이 고운 단청을 입었다. 사람도 나무들과 같이 곱게 늙어가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스핑크스 바위가 오가는 사람들을 오래 바라보고 있다.
도봉산 관음암

- 오백 나한을 모신 관음암에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돈다. 주봉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어 천둥과 벼락이 쳐도 무너질 일 없겠다. 무너지지 않는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어야 한다고 오백 나한이 말하고 있다. 오백 미소를 짓고 있다. 삼천대천이 열려야 한다며.
도봉산 주봉에서 본 서울

- 사람 얼굴을 닮은 바위와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듣는 침묵이 맑다. 주봉 테라스에 일생의 터를 마련한 명품의 소나무가 귀 기울인 끝에 마침내 침묵마저 들리는 귀가 되었다. 말없이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사람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가? 하루를 열심히 산.
도봉솔과 북한산

- 비밀의 정원이다. 찾아가는 길은 어느 지도에도 없다. 길은 꼭꼭 숨고 입구마저 바위로 막아두었다. 결코 세상에 몸 드러낼 일 없다. 도봉산과 북한산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고담(枯淡)한 은자의 무심이 세상을 단박에 깨끗이 쓸어버렸다.
도봉의 에덴동산에서

- 형상은 기묘하고 기상은 돌올하다. 가만히 있어도 움직이고, 움직이고 있어도 부동인 세계다. 신선대,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등용악의 봉우리들이 이룬 도봉은 지극한 도의 세계요 낙원이다. 이 낙원을 지키는 일품의 다섯 소나무 형제가 일심으로 다 같이 우러르고 있다.
선인봉과 소나무

- “ 한 가지가 움직이면 온 잎이 흔들리고, 한 마음이 흩어지면 온 생각이 다 망녕되다(일지동칙만엽불녕一枝動則萬葉不寧, 일심산칙만려개망一心散則萬慮皆妄)”고 하였다. 순일한 한 마음이다. 제 몸을 틀고 들어 올려 옆으로 허공을 건너갔다. 고산앙지, 저 드높은 선인을 우러르고 있다.
응봉능선에서 웅자(雄姿)의 북한산 그 장엄미를 보다
관봉에서 본 북한산의 가을

- 소나무가 본다. 사람이 본다. 함께 보는 세상이 넓고 깊다. 화용의 빛으로 빛나는 절정의 가을 북한산이 곱다. 단풍마다 주렴 같은 고운 미문(美文)이 흐른다. 화목(畵目)이 곧 시안(詩眼)이다.
북한산 향로봉의 노을

- 아침이 있으면 저녁이 있다. 또한 저녁이 와야 아침이 온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다 같이 열심히 일구는 하루하루다. 노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고요하다. 그 고요 속에서 다시 밝을 아침이 보인다.
비봉

- 추사 김정희의 숨결과 정신이 깃든 우뚝한 봉우리다. 세상의 중심으로 솟은 비봉이다. 수도 서울을 환포하며 유장하게 흘러가는 강물이 하늘에도 장엄히 흐른다. 도저한 기운이 사방팔방으로 뻗치고 있다.
삼각산 진관사

- 옛 국찰(國刹)의 면모로 새롭게 일신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모두의 복이다. 마음의 평화와 샘물 같은 미소가 도는 청정 도량이다. 이 골물 저 골물 다 받아주는 마음의 정원이 맑고 투명하게 빛난다. 걸음은 이미 저 산사로 가는 길 위에 있다.
형제 소나무와 달

- 대지를 움켜쥔 뿌리들의 악력이 생생하다. 의좋은 소나무 형제애가 세상의 그 어떤 바람으로부터도 꿋꿋하다. 늘 혼자 오고 혼자 가는 달의 무심이 희다. 흰 무심이 환하게 쏟아지고 있다.
사모바위

- 저쯤은 돼야 바위라고 하지. 눈 없이도 보는 눈을 가졌다. 귀 없이도 듣는 귀를 가졌다. 이미 수억만 년 전에 자신에게 도착한 바위다. 움직일 이유가 없다. 부동의 그 자리서도 천리를 가는 바위다. 시끄럽다 마음아! 나, 잠시 저 바위가 되어 앉아 있을 것이려니.
사자능선에서 천명에 귀 기울인 산의 침묵을 듣다.
무상

- ‘이제는 가야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야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돌아가랴. 지금이 돌아가기에는 가장 좋은 때.’ 나무를 떠나는 낙엽들의 잔잔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우리도 잠시 돌아가 있어야 할 이 겨울.
북한산 보현봉과 문수사

- 뻗치고 승하는 기운이 생생하다. 나아가고 멈추는 동(動)과 부동(不動), 생하고 멸하는 형(形)과 상(象)이 현현묘묘하다. 저 뿜어나는 기운에 쏘인 감전된 시간들에 그만 묶이고 만다.
북한산 사자봉

- 숫사자봉, 암사자봉 한 쌍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감히 사람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저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쉽게 이르지 못하는 곳에 대한 신비는 경외감으로 이어진다. 최소한 저 곳엔 분명 악과 불의는 없다. 산이 산이었던 그 본디의 산이 있다.
북한산 형제봉과 북악

- 보현봉-형제봉-북악으로 이어진 유려한 산줄기다. 산이 세상으로 내려갈 땐 다 그만한 뜻이 있다. 천하 명당의 길지에 성저십리까지 펼쳐졌던 옛 도성이 보인다. 사람이 사람의 뜻을 세워 사람의 산을 만든다. 솟구친 북악의 목소리가 들린다.
초겨울 산길

- 사람 없는 산길에 외로움만 깊어진 유령바위의 눈이 퀭하네. 나뭇잎도 떠나는 이 겨울 그대들 어디로 가시는가. 수북이 쌓인 낙엽 위로 바람도 산을 떠나고 있네. 다시 돌아올 초록의 봄을 위하여.
팥배나무 열매

- 잘 익은 능금 빛 작은 열매 보석처럼 빛나네. 새들도 아까워 아껴두고 오래 보네. 겨울이 오며 제 빛이 더 푸르러진 소나무가 팥배나무 그 단심을 은연히 바라보고 있네.